
타자의 그림자 — ‘곡성’의 오컬트적 불안
영화 <곡성>의 공포는 귀신보다 인간에게서 비롯된다. 이 작품이 탁월한 이유는,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 인간의 불안을 해부하기 때문이다. 낯선 외지인, 알 수 없는 병, 무너지는 공동체. 이 모든 것은 한국적 오컬트의 핵심 구조인 ‘타자에 대한 공포’를 시각화한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무속신앙에서 말하는 “신의 부재가 만든 혼돈의 시간”을 떠올린다. 신은 침묵하고, 인간은 불안을 신의 형상으로 바꾸어 숭배한다.
외지인(쿠니무라 준)은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해석되지 않는 존재’로 남는다. 그는 귀신이면서 인간이고,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다. 그 애매함이 바로 이 영화의 오컬트적 불안을 만든다. 무속에서는 이런 존재를 ‘경계의 신(神)’이라 부른다. 신과 마귀의 구분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모호한 영혼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몰아내며 스스로의 공포를 정당화하지만, 그 행위는 오히려 악을 실체화시킨다. 나는 이 점이 무속적 사고의 역설이라고 본다. 의심이 깊어질수록, 악은 실재가 된다.
감독 나홍진은 이 불안을 ‘보이지 않는 신앙의 지형’으로 형상화한다. 비, 진흙, 산길, 그리고 썩어가는 사체까지. 모든 풍경은 신의 질서가 무너진 자연의 모습이다. 카메라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인물들은 믿음과 불신 사이를 오간다. 이때 관객이 느끼는 공포는 단순한 초자연적 두려움이 아니라,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 자체”다. <곡성>의 오컬트는 귀신이 아니라 ‘믿음의 붕괴’에서 태어난다.
무속과 신부 — 믿음의 두 언어
<곡성>에서 무당 일광(황정민)과 신부 양이삼(김도윤)은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세계를 해석한다. 하나는 신의 뜻을 굿으로 번역하고, 다른 하나는 성경의 문장으로 중개한다. 나는 이 장면들이야말로 한국 오컬트 영화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두 신앙은 서로 대립하지만, 사실상 같은 질문을 품고 있다. “무엇이 진짜 악인가?”
무속은 경험의 신앙이다. 몸으로 느끼고, 기운으로 감지하며, 의심 대신 행동으로 증명한다. 일광이 굿판을 벌이며 “잡았다!”라고 외치는 순간, 그것은 증거가 아니라 선언이다. 반면 기독교적 믿음은 언어의 신앙이다. 성서의 구절, 기도의 음성, 그리고 신의 이름을 반복함으로써 현실을 다스린다. 신부의 주문은 굿과 다르지 않다. 다만 사용하는 언어가 라틴어일 뿐이다.
나는 이 대립이 한국 오컬트의 근원적 긴장을 드러낸다고 본다. <곡성>의 세계에서는 두 믿음 모두 완전하지 않다. 무당은 속고, 신부는 침묵한다. 둘 다 진실에 닿지 못한 채, 인간의 두려움만 증폭시킨다. 결국 신앙은 도구가 아니라, 해석의 프레임이다. 믿음이 강하다고 구원이 보장되지 않고, 의심이 깊다고 악이 드러나지도 않는다. 감독은 이 모호함 속에서, 신앙의 언어가 인간을 구원하기보다는 오히려 미혹시키는 모습을 그린다.
오늘날의 해석 — 의심의 시대에 남은 신앙의 형상
<곡성>은 믿음의 영화다. 하지만 그 믿음은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나는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신앙이란 결국 인간의 두려움을 다스리는 장치’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신을 믿지만, 그 믿음이 서로 다르다. 어떤 이는 굿으로, 어떤 이는 기도로, 또 다른 이는 침묵으로 신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결과는 같다.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 이 절망이야말로 현대 오컬트의 본질이다 — 믿음이 붕괴된 세계에서, 인간은 여전히 신을 찾는다.
감독 나홍진은 <곡성>을 통해 ‘믿음의 해체’를 시각화한다. 카메라는 기도를 하는 손과 피 묻은 손을 같은 프레임에 담는다. 악마를 쫓는 의식과 악마를 초대하는 의식은 닮아 있다. 나는 이 구도가 무속신앙이 지닌 이중성을 떠올리게 했다. 신앙은 언제나 양면적이다. 그것은 구원과 파멸을 동시에 품는다. <곡성>의 세계에서 인간은 신을 두려워하면서도, 신의 증거를 원한다. 그 모순이 결국 ‘의심의 의례’를 낳는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의 시대에 살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이 사라진 자리에 불안이 남는다. 오컬트는 그 불안을 재구성한 서사다. 그것은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세계의 잔여, 혹은 인간 내면의 그림자다. <곡성>은 이 잔여를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나는 이 영화를 단순한 공포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신이 침묵한 이후에도 신앙은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의례이며, 믿음이 끝난 자리에서 인간이 어떤 형상으로 남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