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힐 —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건 결국 우리였을지도

안개, 그 이상한 감정
사일런트 힐을 다시 봤다. 예전에 봤을 때는 그냥 괴물 나오는 공포 영화로만 기억했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영화보다 그 공기, 그 안개가 더 오래 남았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숨 막히는 것도 아닌데 계속 눌려 있는 느낌. 그 도시의 소리도 이상하다. 종소리가 멀리서 울리는데, 공간이 무한히 늘어나는 것 같달까. 가끔 현실에서도 그런 순간이 있다. 아무 일도 없는데 갑자기 공기가 이상하게 바뀌는 때. 그때마다 나는 이 영화 생각이 난다.
무속에서 안개는 경계라고 한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경계, 현실과 비현실의 틈. 그 말이 진짜인 것 같다. 사일런트 힐은 귀신보다 그 ‘틈’ 자체가 더 무섭다. 주인공이 딸을 찾으러 들어가지만, 보다 보면 그게 딸 때문인지 자기 자신 때문인지 헷갈린다. 그 도시는 결국 ‘자기 자신을 마주해야만 나갈 수 있는 곳’ 같았다. 근데 그게 진짜 무섭다. 나는 아직 내 안의 무언가를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으니까.
예전에 나도 그런 걸 겪은 적이 있다. 정확히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용어가 있었던 것 같은데, 글을 쓰려니까 생각이 안 난다. 아무튼 그때 나는 이상하게 현실이 어긋난 느낌이 들었다. 출근길에 항상 걷던 길인데, 그날따라 거리가 달라 보였다. 빛도 다르고, 소리도 멀리서 울리는 것 같고. 누가 내 이름을 부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내 착각 같기도 하고. 그냥 몸만 현실에 있고, 마음은 어딘가 엇나가 있는 느낌. 그때 그 기분이 사일런트 힐의 안개랑 너무 비슷했다.
신을 믿는 사람들보다 무서운 사람들
사람들은 이 영화를 귀신 영화라고 하지만, 나한텐 신앙 영화로 느껴졌다. 거기에 나오는 종교 집단 있잖아. 그 사람들, 진짜 무섭다. 악마보다, 귀신보다. 그들은 신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 확신을 신이라고 부른다. 그게 제일 위험한 거다. 나도 예전에 그런 적 있었다. 누군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싸웠는데, 사실 그때 나는 내 믿음이 틀렸을까 봐 더 무서웠던 것 같다. 그때 느꼈다. 믿음은 때로 칼이 될 수도 있다.
영화 속 사람들도 다 똑같다. 신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태우고, 그걸 정의라고 부른다. 정화라고 믿는다. 근데 그 장면을 보면, 신은 없고 인간만 남는다. 사일런트 힐의 진짜 공포는 초자연적인 게 아니라, ‘신을 믿는 인간’이다. 악마는 솔직하다. 근데 인간은 자신을 신처럼 믿는다. 이게 현실에서도 다르지 않다는 게 더 소름이다.
요즘 인터넷 보면 그런 생각 든다. 사람들이 자기 믿음을 들이밀면서 다른 사람을 불태운다. 댓글로, 말로, 침묵으로. 영화 속 불구덩이랑 뭐가 다를까 싶다. 그래서 사일런트 힐을 보면 그냥 허구의 얘기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건 너무 현실적이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나
마지막 장면은 참 이상하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빛이 달라. 같은 집인데 공기가 낯설다. 그 장면이 나한텐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았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분명히 내가 알던 공간인데, 어느 날 갑자기 낯설게 느껴질 때. 그럴 땐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생긴다. ‘내가 돌아온 게 맞나?’ 그런 생각이 스치면서.
사일런트 힐에서 사람들은 결국 아무도 돌아오지 못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게 꼭 비극만은 아닌 것 같다. 그 도시는 죄와 기억으로 만들어졌고, 그래서 존재한다. 잊지 못한 마음, 용서하지 못한 순간, 그런 것들이 안개처럼 쌓여서 만들어진 공간. 그걸 생각하면, 그 도시도 누군가의 마음일 수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그 안개가 사람의 기억 같다고 느낀다. 잊으려 하면 더 짙어지고, 받아들이면 조금 옅어지는 그런 기억들. 무속에서는 ‘해원’이 되지 않은 영혼이 세상에 머문다고 한다. 근데 어쩌면 우리도 해원되지 못한 사람들 아닐까. 다들 자기만의 사일런트 힐을 안고 사는 거다. 그 안개 속에서 길을 찾는 척하면서, 사실은 잊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거다.
그래서, 결국엔
결국 사일런트 힐은 신이 사라진 도시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남아 있다. 신이 없다고 해서 신앙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건 사람 속에 남아 있는 어떤 기억 같은 거다. 나도 아직 내 안에 그런 안개가 있다. 가끔 새벽에 혼자 있을 때, 이유 없이 불안해질 때면 이 영화가 생각난다. 이상하게 그때마다 조금 위로받는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공포라고 부르지만, 나에겐 슬픔의 영화다. 그 안개는 두려움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마음들’이 피워 올리는 연기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 무섭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인간적이라서. 그리고 아마, 그 도시는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게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