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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위치 — 신앙의 틀 밖으로 걸어 나온 첫 번째 인간

컬트라쿤 2025. 10. 31. 14:28

마녀의 사진

조용한 영화, 그런데 묘하게 불안했다

더 위치를 처음 봤을 때 나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지루했다. 요즘 공포영화처럼 갑자기 ‘꽝’ 소리 나지도 않고, 귀신이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참 뒤에야 그 공포가 밀려왔다. 마치 조용히 있다가 밤에 문득 생각나는 악몽처럼. 영화는 어둡고 침착하다. 대사는 거의 없고, 인물들은 늘 기도한다. 그런데 그 기도가 점점 두려움으로 바뀐다. 처음엔 신에게 도움을 청하던 목소리가, 나중엔 신을 원망하는 울음으로 바뀐다. 그 소리가 너무 낯설었다. 기도가 이렇게 절망적으로 들릴 수도 있구나 싶었다.

배경은 17세기 청교도 시대. 신의 뜻을 어기면 죄, 죄를 짓는 건 곧 지옥. 그 단순한 체계 안에서 한 가족이 교회에서 쫓겨난다. 이유는 신앙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철저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누구보다 열심히 기도했고, 그래서 공동체가 그를 부담스러워했다. 너무 믿어서 쫓겨나는 사람이라니, 그 아이러니가 영화의 시작부터 모든 걸 말해준다.

숲과 가족, 그리고 깨져가는 믿음

그들은 숲 근처로 이주한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단지 나무, 안개, 동물의 숨소리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고요함 속에서 이상한 일들이 시작된다. 아기가 사라지고, 염소가 밤마다 울고, 옥수수는 썩고, 엄마는 울고. 모든 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져간다. 그런데 그 공포의 핵심은 마녀가 아니다. 진짜 무서운 건 가족들이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신을 잃은 사람은 먼저 타인을 의심한다. 아버지는 딸을 의심하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아이들은 서로를 탓한다. 그 안에서 믿음은 점점 좁아진다. 결국 믿음은 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누가 죄인인가”를 찾는 칼이 된다.

그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예전에 내가 겪었던 이상한 시기가 떠오른다. 정확히 뭐라 부를 수 없는 시기였다. 그냥 모든 게 어긋나 있던 시절. 믿고 있던 것들이 다 틀린 것 같고, 사람들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고. 그때는 매일이 불안했다. 기도하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계속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었다. ‘제발, 내가 틀린 게 아니라고 해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래가면, 사람은 이상하게 변한다. 누군가를 탓하거나, 아니면 스스로를 마녀로 만들어버리거나.

토마신의 죄, 혹은 존재

이 영화의 주인공 토마신은 가족 안에서 계속 낯설다. 그녀는 딸이고, 언니고, 가족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이질적인 존재다. 아버지는 그녀를 죄의 근원처럼 보고, 어머니는 딸을 경쟁자로 여긴다. 그녀가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모든 잘못은 결국 그녀에게 돌아온다. 그게 가장 현실적인 공포였다. 토마신은 결국 스스로 묻는다. “정말 내가 마녀라면 어쩌지?” 그건 자기 부정이 아니라, 자기 인식의 시작이었다. 영화는 그 지점을 너무 냉정하게 보여준다. 사회가 ‘너는 죄인이다’라고 말하면, 그 말이 반복될수록 사람은 그 죄의 이름으로 자기 존재를 재정의한다. 결국 그게 마녀의 탄생이다.

나는 그 장면이 너무 아팠다. 토마신이 울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숲을 바라볼 때. 그건 체념 같지만, 사실은 각성이다. 그녀는 더 이상 신의 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로 서는 중이다. 그게 세상에선 죄로 보였을 뿐이다.

“달콤하게 살고 싶으냐”

영화 마지막에 블랙 필립이 말을 건다. 염소인데, 악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너무 부드럽다. “Wouldst thou like to live deliciously?” 달콤하게 살고 싶으냐는 질문. 그건 유혹이라기보다 초대처럼 들린다.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겠냐는 제안. 토마신은 잠시 망설이다가 ‘Yes’라고 한다. 그리고 웃는다. 그 미소가 너무 묘했다. 무섭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그냥 해방이다. 그녀는 이제 진짜 자유를 얻었다. 누구의 딸도 아니고, 죄인도 아니고, 누군가의 신앙 안에 갇힌 존재도 아니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이상하게 울컥했다. 그건 악의 미소가 아니라, 인간의 미소였다.

나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뭔가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그냥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던 때. 너무 버티느라 지쳐서, 누가 뭐래도 그냥 “그래, 됐다” 하고 싶은 마음. 그게 자유인지 체념인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편했다. 그 감정을 대니(<미드소마>)에서 봤고, 토마신에서도 봤다. 결국 두 사람 다, 버림받은 자들이 아니라 세상이 이해하지 못한 자유인이었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묘하게 여운이 남는다. 신도, 구원도, 교회도 다 사라졌는데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토마신은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그녀 뒤로 새벽이 밝아온다. 그 장면이 잊히질 않는다. 그건 어둠이 아니라 새로운 아침이었다. <더 위치>는 결국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를 구원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 구원이 죄로 보이든, 악으로 불리든 상관없다. 신의 언어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진심, 그게 오컬트의 본질 아닐까.

나는 이 영화를 ‘악마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인간 회복의 영화’다. 우리가 외면해온 본능, 욕망, 자유, 그 모든 게 사실은 우리 안의 신성이다. 신이 떠난 자리에 남은 건 결국 인간뿐이고, 그 인간이 다시 신을 만들어간다. 그게 마녀의 미소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만약 누군가 내게 “달콤하게 살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예전엔 죄책감이 먼저 떠올랐을 텐데, 지금은 그냥, “그래. 조금은.”이라고 말할 것 같다. 그게 인간이다. 완벽하지 않지만, 진짜 살아 있는 존재. 아마 그래서 토마신이 마지막에 웃었을 거다.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