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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하 — 신은 언제나 인간의 틈에서 태어난다

컬트라쿤 2025. 11. 6. 10:00

불상의 사진

이상하게 조용한 영화, 그런데 무서웠다

사바하를 처음 봤을 때, 이게 공포 영화인지 종교 영화인지 헷갈렸다. 빛이 밝은데도, 공기가 너무 차가웠다. 그 특유의 ‘조용한 불안’이 영화 전반을 지배한다.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하지 않는데, 그 침묵 사이사이로 묘한 기운이 흐른다.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보다 두 번째 볼 때가 더 무서웠다. 내용을 알고 나니까, ‘이건 신앙의 이야기라기보다 인간의 이야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단순히 이상한 종교를 다루는 스릴러처럼 보인다. 하지만 곧 깨닫게 된다. 이건 악이나 귀신의 얘기가 아니라, ‘신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누군가가 신을 믿기 시작할 때, 그 믿음이 어떻게 폭력으로 변하고, 어떻게 사람을 삼켜버리는지를 보여주는 영화. 그래서 사바하는 잔인하지 않게 무섭다. 잔인함은 화면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에서 나온다.

그 아이들은 왜 버려졌을까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나는 쌍둥이 자매. 언니 금화는 다리 밑에 버려지고, 동생 금옥은 신흥 종교 집단 ‘사바하’의 교주 밑에서 자란다. 한쪽은 인간 세상에서 버려지고, 다른 한쪽은 ‘신의 아이’로 길러진다. 그 둘의 운명이 뒤엉키면서 이야기가 굴러간다. 처음엔 단순히 불쌍한 소녀들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구조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신은 언제나 ‘버려진 자들’ 속에서 태어난다. 누군가가 너무 고통스럽게 버려질 때, 그 공백을 신이라는 이름이 메운다. 그게 이 영화의 잔인한 진실이다.

나는 금화가 터널 안을 기어 나오는 장면을 잊을 수 없다. 그건 거의 ‘지옥에서 태어나는 신’처럼 느껴진다. 피투성이 얼굴로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녀는 이미 인간이 아니다. 구원받지 못한 존재가 아니라, ‘구원을 거부당한 존재’로 남는다. 그게 더 슬펐다.

신부도 아닌, 무당도 아닌 — 박 목사의 믿음

영화의 중심에는 박 목사(이정재)가 있다. 그는 기독교 목사이지만, 실제로는 종교보다 ‘이단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겉으로는 냉정하고 분석적이지만, 사건에 휘말리면서 점점 신앙의 본질에 다가간다. 특히 ‘사바하’ 교단의 교주를 조사하면서 그의 믿음이 흔들린다. 교주는 자신을 ‘신의 메신저’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가 믿는 신은 사랑의 신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만 구원하는 배타적 신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소름 돋는 건 그 교주의 말이 아니라, 그를 믿는 사람들의 눈빛이다. 모두가 똑같이 반짝인다. 믿는다는 게 이렇게 무서울 수도 있구나 싶었다.

박 목사는 그 믿음을 해체하려 하지만, 결국 자신도 같은 질문에 빠진다. “그럼 진짜 신은 어디에 있는가.” 그 질문이 영화가 끝나고도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나도 그랬다. 믿음을 연구하다가, 결국 믿음이 필요해지는 아이러니. 이 영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 무섭다. 악마보다 무서운 건, 신을 너무 열심히 찾는 인간이다.

사람이 만든 신, 그리고 신이 만든 폭력

사바하의 세계에서는 신이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신을 만들어낸다. 교주는 말한다. “신은 선택받은 자에게만 은총을 내린다.”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모른다. 구원에서 ‘누군가를 제외하는 순간’, 그 신앙은 폭력이 된다. 그래서 사바하는 종교 영화가 아니라, ‘신앙이 타락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인간 심리 영화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도 비슷하다. 누군가를 ‘옳은 자’ ‘깨끗한 자’ ‘선택받은 자’라고 나누는 순간, 이미 폭력이 시작된다. 교단의 교주나 정치인이나 다르지 않다. 신의 이름을 빌려 자신을 정당화하는 사람들. 나는 그게 영화 속 가장 현실적인 공포라고 느꼈다.

특히 금화와 금옥의 관계는 너무 상징적이다. 한쪽은 버려지고, 한쪽은 신의 아이가 된다. 둘 다 인간인데, 하나는 죄인, 하나는 구원자. 그런데 둘의 고통은 똑같다. 결국 ‘신의 아이’라는 말조차 인간이 만든 구분이었다. 이 영화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신앙은 언제나 누군가를 희생시킨다.

빛이 가장 밝은 곳에서 그림자는 짙어진다

사바하의 마지막 장면에서, 박 목사가 광란의 교단 의식을 바라보는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수백 명의 신도들이 흰 옷을 입고 노래를 부른다. 햇빛이 가득한데, 그 빛이 차갑다. <미드소마>에서 느꼈던 그 역설적인 밝음이 여기서도 반복된다. 빛이 너무 강하면 그림자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도리어 짙어진다. 사람들은 신을 찬양하지만, 그 노래가 마치 주문처럼 들린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서늘했다. 그건 악마의 장면이 아니라, ‘신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신이 인간의 손으로 다시 조립되는 그 광경. 그건 구원이 아니라 실수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신은 인간의 틈에서 태어난다

영화의 제목 ‘사바하’는 원래 불교에서 ‘마지막의 기도’를 뜻한다. 모든 불안과 괴로움이 끝나기를 바라는 말. 하지만 영화 속 사바하는 그 말이 오히려 시작이 된다. 신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폭력, 구원의 이름으로 이어지는 죽음, 그 모든 것이 인간의 손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기분이 이상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너무 현실 같아서. 요즘 세상에서 믿음이란 게 뭐지? 과학도, 종교도, 이념도 다 신앙처럼 작동한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믿어야만 안심하니까. 그게 신이든, 데이터든, 주식이든, 믿음이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신이 태어난다. <사바하>는 그걸 너무 정확히 보여준다. 신은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항상 인간의 틈에서, 인간의 불안 속에서 태어난다.

결국 남는 건, 질문 하나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 나는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신은 있을까?” 이 질문은 단 한 번도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 박 목사도, 금화도, 그리고 우리도 평생 그 질문을 안고 살 거다. 사바하는 그 질문을 던지고 끝내버린다. 정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신이 존재하든 안 하든, 우린 여전히 믿음을 찾으려 애쓰는 인간이니까. 그게 슬프고, 그래서 아름답다.

나는 이 영화를 종교 영화로 보지 않는다. 이건 인간에 대한 다큐멘터리 같다. 믿음을 잃은 사람들, 믿음을 만들어낸 사람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낀 우리. 신은 멀리 있지 않다. 아마 지금도, 누군가의 불안과 사랑 사이에서 조용히 태어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