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 신을 욕망한 인간의 사랑

신부가 피를 마셨다
박쥐를 처음 봤을 때,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이건 분명 공포 영화인데, 동시에 너무 인간적이었다. 신부가 피를 마시고, 연애를 하고, 욕망에 휩쓸린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게 이해됐다. 신앙이란 게 결국 인간의 욕망 위에 세워진 거니까. 이 영화는 그걸 아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피와 성욕, 구원과 죄악이 같은 화면 안에서 섞인다. 처음엔 불편했는데, 나중엔 그게 진짜 ‘인간’ 같았다.
주인공 상현(송강호)은 ‘에마누엘 신부’다. 죽어가는 환자를 위해 자원해 실험 백신을 맞았다가, 뜻밖에도 살아남는다. 하지만 그건 기적이 아니라 저주였다. 피를 마셔야만 생존할 수 있는 ‘吸血(흡혈)’의 병. 신부로서 가장 금지된 욕망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때부터 그의 신앙은 천천히 녹아내린다. 그는 여전히 기도하지만, 그 기도는 구원이 아니라 핑계가 된다. “나는 아직 인간이다.” 하지만 그의 입술엔 피가 묻어 있다.
사랑이 구원이 될 수 있을까
상현이 태주(김옥빈)를 만나는 순간, 이 영화는 오컬트에서 멜로로 변한다. 그녀는 불행한 여자다. 병약한 남편 밑에서 갇혀 살고, 시어머니의 그림자 아래 눌려 있다. 그녀는 처음 상현을 신처럼 본다. 하지만 금세 그가 인간이라는 걸 알아버린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의 피를 나누기 시작한다. 피와 사랑이 구분되지 않는 장면들. 잔혹하면서도, 묘하게 아름답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이 구원이 아니라 더 깊은 타락이 된다는 거다. 태주는 점점 피에 취하고, 상현은 점점 죄책감에 잠긴다. 그녀에게 피를 주면서도, 그는 기도한다. “주여, 저를 용서하소서.” 하지만 신은 대답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신은 이미 떠났다. 신이 떠난 자리에 남은 건, 단 두 사람의 욕망뿐이다. 그건 사랑이라기보다 서로의 구멍을 메우는 행위다. 그게 너무 슬펐다.
박찬욱의 피는 예배처럼 흐른다
박찬욱 감독은 피를 단순한 공포로 쓰지 않는다. 그 피는 일종의 성체(聖體) 같다. 성당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라고 외우던 신부가, 이제 진짜 피를 마신다. 아이러니가 완벽하다. 그는 죄를 지었지만, 동시에 신의 피를 대신 마신 인간이 된다. 영화 속에서 피는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다. 그저 인간의 본질이다. 살기 위해서 마시고, 사랑하기 위해서 마신다. 그건 예배이자 생존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묘하게 마음이 진정된다. 잔인하고 기괴한데, 묘하게 따뜻하다. 두 사람은 피투성이가 되지만, 서로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그건 신을 향한 기도가 아니라, 인간을 향한 기도다. 어쩌면 박쥐는 ‘신앙이 끝난 자리를 채우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욕망과 구원 사이의 줄타기
상현은 계속해서 자신을 단죄한다. 그는 죄를 인정하고, 피를 끊으려 하지만 실패한다. 태주는 점점 괴물로 변한다. 그녀는 밤마다 사냥을 나서고, 상현은 그런 그녀를 말리지 못한다. 결국 그들은 서로를 구원하려다, 서로를 파멸시킨다. 이게 참 인간적이다. 우리는 늘 누군가를 구하려다 같이 망가진다. 영화는 그걸 너무 차갑게 보여준다.
가장 인상 깊은 건 마지막 장면이다. 태주를 데리고 새벽 바다로 나가는 상현. 그들은 차 안에서 태양을 기다린다. 숨이 가빠지고, 피가 말라간다. 둘은 마지막까지 서로를 바라본다. 그때 태주가 말한다. “이거 너무 오래 걸린다.” 그리고 웃는다. 그 장면에서 나는 울었다. 이게 사랑의 끝이고, 신앙의 끝이구나 싶었다.
박쥐는 결국 인간의 고해성사다
박쥐를 단순히 ‘吸血귀 영화’라고 부르면 너무 얕다. 이건 신과 인간, 욕망과 속죄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고해성사다. 신부는 신을 섬기려다 결국 인간이 되었고, 인간을 사랑하다 결국 신을 잃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어쩌면 구원보다 더 아름답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신을 사랑하는 건 결국 자기 욕망을 사랑하는 일 아닐까. 우리는 신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신의 이름으로 죄를 짓는다. 그게 인간이다. <박쥐>는 그걸 인정한다. 그래서 불편하고, 그래서 솔직하다.
태양이 떠오르고, 차는 불타오른다. 둘은 잿더미가 된다. 그런데 그 장면이 너무 평화롭다. 피와 욕망이 다 타버리고 나면, 남는 건 침묵뿐이다. 그 침묵이 어쩌면 신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박쥐는 결국 그렇게 끝난다 — 신을 욕망한 인간들의 가장 아름다운 죽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