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한 돼지, 그리고 시작된 불길한 이야기
검은 사제들은 이상한 영화다. 시작부터 ‘돼지’가 등장한다. 교통체증이 심한 도심 한가운데, 갑자기 검은 돼지가 튀어나온다. 그건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뭔가를 ‘운반하는 그릇’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악령의 통로였다. 그때부터 영화의 공기가 바뀐다. 이건 귀신이 나오는 호러가 아니라, ‘악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걸 느꼈다.
영화 속 김신부(김윤석)는 바티칸에서 승인받지 않은 ‘비공식 퇴마 의식’을 진행 중이다. 교단에서는 위험하다고 말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그 이유가 있다. 몇 년 전, 그가 맡았던 ‘마르코’라는 소년이 퇴마 도중 죽었기 때문이다. 김신부는 그 사건을 스스로의 죄로 여긴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끝을 보려 한다. 그의 믿음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죄를 씻고 싶은 죄책감’으로 움직인다. 그게 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그 아이 안에 또 다른 아이가 있어요.”
이번 사건의 중심엔 여고생 영신(박소담)이 있다. 교통사고 이후부터 그녀의 몸에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 아무 이유 없이 코피를 쏟고, 낯선 언어를 말하고, 자기 목소리가 아닌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녀의 눈빛이 점점 변한다. 가끔 화면 속 영신의 얼굴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데, 그 순간 관객은 직감한다. ‘그 아이 안에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 그 존재의 이름은 ‘바룩(Barq)’. 성서에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 고대의 악령이다. 영신의 입을 빌려 말하길, “나는 마르코를 알고 있다.” 그 한마디가 김신부를 완전히 흔든다. 그는 알 수 없는 공포와 죄책감 속에서 이제 그 의식이 단순한 구원이 아니라 ‘속죄의 재연’이 되어버렸음을 느낀다.
그때 합류한 인물이 바로 최부제(강동원)다. 신학교를 막 졸업한 그는, 처음엔 단순히 ‘현장 경험을 쌓으러 온 후배’일 뿐이었다. 그런데 김신부의 비밀스러운 행적에 끌려, 결국 이 위험한 의식에 동참하게 된다. 그의 세례명은 ‘마가’. 성서 속 마가는 예수를 부정하고 도망쳤던 인물이다. 이 이름은 우연이 아니다. ‘믿음을 의심하면서도 버리지 못한 인간의 상징’. 최부제는 이 영화의 거울이다. 우리는 그를 통해 ‘믿음을 배우는 법’이 아니라, ‘믿음이 흔들릴 때 어떻게 버티는가’를 본다.
퇴마는 의식이 아니라 고백이었다
퇴마 장면은 지금 봐도 압도적이다. 라틴어 기도문이 울려 퍼지고, 영신은 쇠사슬에 묶여 발버둥친다. 피와 성수가 섞이고, 벽엔 십자가가 박혀 있다. 그런데 그 장면이 단순한 ‘악령 퇴치’로 느껴지지 않는다. 김신부가 외우는 주문이 점점 엉키고, 최부제의 목소리는 떨린다. 기도가 기도가 아니라, 고백처럼 들린다. “하느님, 저는 믿음을 잃었습니다.” 그 절규는 악마를 향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고백이다. 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울컥한다. 악마보다 무서운 건, 기도하면서도 신이 듣지 않는다는 확신이다. 그 공백이야말로 진짜 지옥 같다. 결국 퇴마는 악을 내쫓는 게 아니라, 그 공백을 견디는 행위다. 김신부가 그렇게 처절하게 싸우는 이유는, 신을 지키려는 게 아니라, ‘자기 안의 믿음을 지켜내려는 몸부림’이다.
피로 끝난 의식, 그리고 남겨진 죄
영화의 후반부, 의식은 점점 미쳐간다. 영신의 몸은 점점 망가져가고, 바룩은 김신부를 조롱한다. “너는 이미 날 불렀잖아.” 그 말이 소름 끼쳤다. 악마는 항상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불러들인다는 걸 말해주는 대사였다. 김신부는 결국 자신의 피를 내어 성수를 대신해 악령을 봉인한다. 그 장면은 신앙과 육체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다. 피가 성수가 되고, 인간의 고통이 의식이 된다. 그건 신의 축복이 아니라 인간의 희생이었다. 결국 그는 쓰러지고, 최부제가 마지막 의식을 이어받는다. ‘마가’는 마르코의 이름을 외치며, 끝내 영신을 구하려 한다.
그리고 마지막, 영신은 눈을 뜬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불안하다. 악마가 떠났는지, 아니면 다른 얼굴로 남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최부제는 고개를 숙이고 울지만, 그 울음은 패배의 울음이 아니다. ‘믿음이란 건 결국 끝내 완성되지 못하는 싸움’이라는 걸 깨달은 사람의 눈물이다.
한국식 오컬트, 믿음의 잔향
검은 사제들은 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을 의심하는 인간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그게 이 영화의 대단한 지점이다. 퇴마 장면이 화려해서 기억에 남는 게 아니라, 그 장면 속 신부들의 불안이 너무 현실적이라서 남는다. 한국식 오컬트의 강점은 여기에 있다. 무속의 정서, 죄책감의 언어, 신의 부재가 한 장면 안에서 뒤섞인다. 김신부는 신의 이름으로 싸우지만, 그 의식은 거의 굿처럼 보인다. 라틴어 대신 한숨이, 성가 대신 절규가 흘러나온다. 그건 신을 불러내는 의식이라기보다, 신의 부재를 견디는 인간의 울음 같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이 환해졌을 때, 나는 이상하게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무섭다기보다, 슬펐다. 신이 진짜 있다면 왜 이렇게 침묵할까. 하지만 동시에, 그 침묵 속에서도 누군가는 계속 기도한다. 그게 인간이고, 그게 믿음이다. 김신부가 마지막까지 손을 떨며 십자가를 붙잡던 이유도, 아마 그거였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당신을 믿고 싶습니다.” 그 한 문장이 영화 전체를 설명한다.
검은 사제들은 결국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신을 믿나요, 아니면 믿음을 믿나요?” 나는 그 질문을 아직도 다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평생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게, 신앙의 진짜 형태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