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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의 구조 — 언어, 이름, 글자의 힘

컬트라쿤 2025. 10. 11. 19:54

주술사의 사진

서론

“말에는 힘이 있다.” 이 단순한 문장은 인류의 신화와 주술 전통 전체를 관통한다. 언어가 단순히 소리나 기호가 아니라, 세상을 움직이는 실질적 힘으로 여겨졌던 시기 — 그 시대에 ‘저주’는 언어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이 글은 신화 속 언어의 위상과, 말·이름·글자가 어떻게 주술적 힘으로 변모했는지를 다큐해설처럼 따라가며 탐구한다.

말은 칼보다 깊다 — 언어가 주술이 되던 시대

고대인에게 말은 단순한 발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를 불러내는 행위”였다. 히브리 전승에서는 신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며, 동양에서도 한자의 뿌리인 상형문자는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그려내는 주문’으로 여겨졌다. 즉, 언어는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만드는 힘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저주’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저주는 악의적 언어 행위이지만, 그 작동 원리는 신의 언어와 같다. 말이 곧 현실이라면, 누군가를 향한 악의적 발화는 그 자체로 행위가 된다. 이를 ‘언어적 행위(performative utterance)’라고 부르는데, 고대의 저주는 바로 이 언어행위의 극단적 형태였다.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 저주하거나, 종이에 써서 묻거나 태우는 행위는 언어를 매개로 세계에 개입하려는 시도였다.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 이집트의 저주 인형, 중국의 부적(符籍)과 주문(呪文)은 모두 같은 원리를 따른다. 말과 글자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신의 힘이 담긴 ‘그릇’이었다. 고대 문헌에서 저주는 “입으로 쏘는 화살”, “혀의 독”으로 표현된다. 보이지 않지만 명확히 작동하는 힘. 이것이 언어의 신비이자, 동시에 공포의 근원이기도 했다. 결국 인간은 말의 힘을 경외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은 ‘금기어’나 ‘이름을 숨기는 문화’로 발전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곧 상대의 본질을 지배하는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대의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를 통제하고 현실을 움직이는 주술의 도구였다.

이름의 힘 — 불러서는 안 되는 존재들

고대 세계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존재 그 자체였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존재를 소환하고, 이름을 지운다는 것은 그 존재를 세계에서 삭제하는 행위였다. 이름에는 본질과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기에, 많은 신화에서 신의 이름은 감춰지고, 인간의 이름은 신중히 주어졌다. 이집트의 신 이시스가 태양신 라의 비밀스러운 이름을 알아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녀는 독을 만들어 라를 약하게 한 뒤, “이름을 말해야만 낫게 해주겠다”고 요구한다. 라가 자신의 진명을 말하자, 이시스는 그 힘을 일부 빼앗는다. 즉, 이름을 아는 자가 힘을 가진다는 원리가 이미 고대에서 확립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언어관을 반영한다. 동양에서도 이름은 신성한 질서를 상징했다. 중국의 ‘정명(正名)’ 사상은 이름과 실재가 일치해야 세계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믿었다. 이름이 어그러지면 세상도 혼란해진다 — 이 사상은 언어의 정확성을 넘어, 말이 세상을 지탱한다는 믿음을 드러낸다. 한편 한국의 무속신앙에서도 죽은 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금기가 있다. 이름을 부르면 그 영이 불려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름’은 또한 사회적 통제의 수단이었다. 왕조 시대의 ‘휘(諱)’ 문화, 즉 임금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한 제도 역시 이름을 곧 권력으로 본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이름을 감춘다는 것은 권위를 유지하는 방식이자, 존재의 신비를 지키는 의례였다. 결국 이름은 신성과 저주의 경계에 서 있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빼앗거나 왜곡하는 것은 곧 그 존재를 훼손하는 행위였다. 그래서 저주는 종종 ‘이름을 불러 파괴하는 의식’으로 나타났다. 이름은 언어의 가장 압축된 형태이자, 주술의 가장 정교한 표적이었다.

글자의 주술 — 문자가 만들어내는 현실

언어가 소리의 주술이라면, 글자는 그 주술을 ‘형태로 봉인한 것’이었다. 고대인에게 글자는 단순한 기록 수단이 아니라, 말의 힘을 보존하고 재현하는 기호였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신의 언어로 여겨졌고, 중국의 갑골문 역시 제의와 예언을 위해 새겨졌다. 글자를 새긴다는 행위는 곧 세계에 질서를 새겨 넣는 행위였으며, 그 반대편에는 저주의 문자가 있었다. 중국의 도교 부적, 일본의 오후다(御札), 한국의 부적과 주문(呪文)은 모두 ‘글자가 곧 주술’이라는 믿음 위에 세워져 있다. 글자의 모양, 획의 방향, 잉크의 색까지 모두 의례의 일부다. 특히 붉은 글씨는 피와 생명의 상징으로, 죽음과 저주의 세계를 통제하는 방패로 사용됐다. 반대로 흑색의 문자는 파괴와 저주의 의미를 품었다. 글자는 단지 정보를 담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의 힘을 조정하는 ‘도식’이었다. 불교의 ‘다라니(陀羅尼)’ 또한 이 구조와 닮아 있다. 발음할 수 없는 음절의 연속이지만, 그 속에는 신의 힘이 잠들어 있다고 믿었다. 소리와 글자는 서로의 그림자이며, 그림자가 세상에 드리워질 때 언어는 신비로 변한다. 서양에서도 저주와 문자의 관계는 동일하게 작동했다. 중세의 마녀들은 이름을 써서 태우거나, 동판에 글자를 새겨 저주를 완성했다. 그 행위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글자를 통한 현실 개입’이었다. 심리학적으로 보자면, 인간은 언어의 불완전함을 보완하기 위해 시각적 기호로 그 힘을 고정하려 한 것이다. 말은 사라지지만, 글자는 남는다. 그래서 저주는 언제나 기록을 원했다. 결국 글자의 주술은 인간이 세계를 통제하고자 한 시도의 정점이었다. 소리로는 부족했던 힘을, 형태로 남겨 영속시키려는 욕망. 그 결과 저주는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언어와 존재, 그리고 기억의 관계를 드러내는 깊은 사유의 산물이 되었다. 우리가 쓰는 모든 글자에는, 여전히 그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언어는 사라졌지만, 글자는 여전히 속삭인다 — 세상을 만드는 말, 그리고 그것을 거꾸로 부르는 저주의 언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