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길을 걷다 보면 ~사 ~당등의 붉은 글씨와 절 마크를 적잖이 보게 된다. 그곳은 ~보살님 ~장군님을 모시는 소위 '무당'이 사는 집이다.
길거리에서 굿판을 본 적이 없어도, 누구나 매체를 통해 ‘신내림’이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무당은 흔히 신과 인간을 잇는 매개자, 즉 ‘영매(靈媒)’로 불린다. 하지만 현대의 시선에서 그들은 종종 미신이나 사기꾼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이번 취재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그들이 말하는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취재팀은 서울 외곽, 오래된 무속인 집단이 모여 사는 마을을 찾았다. 이곳엔 ‘신을 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한때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병처럼 찾아온 ‘신병(神病)’을 계기로 무당의 길로 들어섰다고 했다. 신병은 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고통이나 환청, 혹은 반복적인 불운으로 시작된다고 한다. 그 고통이 절정에 이르면 ‘신내림’이라는 의식을 통해 무당으로 거듭난다. 누군가에게는 치료이자 운명의 선언이었다.
신내림의 순간 — 그들이 신을 맞이하는 방식
‘신내림’은 신이 한 인간의 몸을 매개로 내려와 거처를 정하는 의식이다. 현장에선 ‘내림굿’이라 부른다. 굿은 단순히 노래하고 춤추는 행사가 아니다. 수백 년 동안 전승된 절차가 있으며, 지역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날 의식은 세 시간에 걸쳐 이어졌다. 북과 장구가 울리고, 제단 위에는 돼지머리·쌀·탁주가 차려졌다. 선배 무당은 붉은 천을 들고 말했다. “오늘 이 사람은 새 신을 받습니다.” 의식이 절정에 다다르자 내림을 받는 이는 울음과 함께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다른 존재가 된 듯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외쳤다. 일부에겐 그것이 ‘빙의’처럼 보였지만, 무속인들에게는 신과 인간이 ‘계약’을 맺는 순간이다. 이후 새 무당은 스승의 인도로 제단에 절하고, 신단에 올릴 첫 제물을 마련한다. 그 의식이 끝나야만 그는 ‘신을 받은 사람’, 즉 무당으로 인정받는다. 취재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그 현장이 혼란스럽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든 행위에는 순서가 있었고, 참여자 모두가 그 질서를 알고 있었다. 신비보다는 ‘규범’이 느껴졌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일종의 제도처럼 보였다.
무당의 일상 — 신과 함께 사는 사람들
내림굿 이후, 새로 신을 받은 무당은 ‘신령님’을 모시며 살아간다. 그들의 집에는 작은 제단인 ‘신단(神壇)’이 있고, 그 위에는 신상(神像)과 향로, 제물이 항상 놓여 있다. 매일 아침 향을 피우며 인사를 올리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다. 무당의 일상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다. 장을 보고, 상담 예약을 받고, 손님을 맞이한다. 하지만 무속의 세계에서는 모든 일에 신의 허락이 따른다. 어떤 무당은 “점사는 내 생각이 아니라 신이 말하는 거예요”라고 했다. 즉, 자신은 단지 중계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최근 들어 이러한 전통 무속은 온라인으로 확장되고 있다. 젊은 세대는 유튜브·틱톡 등에서 ‘신점 라이브’를 보며 위안을 얻는다. 굿을 직접 보러 가지 않아도,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신과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을 ‘디지털 무속화’라고 부른다. 종교와 오락, 그리고 심리 치유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는 것이다. 실제로 무속 상담은 심리치료나 라이프 코칭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삶의 불안이 커질수록, 누군가는 ‘이유 없는 위로’를 찾는다. 그리고 그 답을 무당의 말에서 발견한다.
신을 믿지 않는 취재자의 기록 — 남겨진 질문들
취재를 마친 후에도 ‘신내림’의 진실은 쉽게 정의되지 않았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집단심리나 자기암시의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느낀 건 그보다 복잡했다. 무당에게 신은 절대적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신을 ‘모시는 주체’이자, 동시에 신과 ‘협상하는 인간’이었다. 신내림이란 신비로운 사건이 아니라, 스스로의 불행과 고통을 해석하는 또 하나의 언어처럼 느껴졌다. 한 무당은 인터뷰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신을 믿기 전에, 자기 자신을 믿지 않아요. 신은 그 빈자리를 대신해주는 거예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카메라를 껐다. 믿음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무속은 사라진 전통이 아니라, 여전히 지금 이 시대를 해석하는 살아있는 문화였다.